솔직히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편이었습니다. 한 번 보고 이해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디세이>만큼은 달랐습니다. 사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조금 공부하고 들어간 덕분인지, 처음으로 집중해서 보고 한 번에 이해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다만 옆자리에 앉았던 분이 영화가 끝나고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 안타까움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신화 배경 — 알고 가면 완전히 다른 영화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오디세이는 역사냐, 신화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직접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은 '신화에 가깝지만, 완전히 허구라고 잘라 말하기도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트로이아(Troia), 즉 고대 트로이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현재의 튀르키예 서부 지역을 발굴했을 때, 수천 년 전의 성벽과 유물층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고고학(Archaeology)이란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과거 인류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즉, 신화 속 이야기가 완전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와 뒤섞여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서사시일 가능성이 큽니다(출처: National Geographic).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도 이해해 두면 영화가 훨씬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는 산지가 많아 평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반도 국가입니다. 그 탓에 작은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었고, 이 각각의 도시국가를 폴리스(Polis)라고 불렀습니다. 폴리스란 독립적인 정치 공동체로 기능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의미합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왕들이 연합군을 이뤄 트로이를 공격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파리스(Paris)라는 트로이 왕자에게 있습니다. 세 여신 — 아프로디테(Aphrodite), 헤라(Hera), 아테나(Athena) — 이 황금 사과를 놓고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판정해 달라고 파리스에게 부탁했고, 아프로디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해 선택받게 됩니다. 그 '선물'이 하필 스파르타 왕의 왕비 헬레네(Helene)였고, 파리스가 그녀를 트로이로 데려가면서 10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줄거리 — 이 영화가 헷갈리는 진짜 이유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구조 자체였습니다. 놀란 감독 특유의 비선형 서술(Non-linear Narrative), 즉 시간 순서를 뒤섞어 여러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선형 서술이란 사건을 시간순이 아니라 회상, 교차, 병렬 등의 방식으로 배치하는 영화 기법입니다. 신화를 모르면 '지금 어느 시점 이야기인지' 파악이 어려우니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실제 첫 장면은 이타카(Ithaca) 섬의 왕궁에서 시작합니다. 100명이 넘는 구혼자들이 왕궁에 눌러앉아 왕비 페넬로페에게 재혼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같은 시각, 오디세우스(Odysseus)는 칼립소(Calypso)라는 님프의 섬에서 기억을 잃은 채 7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두 장면이 교차 편집되면서 영화가 시작되고, 칼립소의 질문에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되살리며 회상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회상 속에서 10년 트로이 전쟁과 귀환 여정이 펼쳐집니다. 오디세우스가 거쳐 가는 여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키클롭스(외눈박이 거인)의 섬 — 거인의 눈을 찔러 탈출하지만, 거인이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빌어 이후 모든 고난의 씨앗이 됩니다.
- 라이스트뤼곤족(철갑 거인 기사)의 영역 — 12척의 배 중 11척을 잃고 한 척만 남게 됩니다.
- 키르케(Circe) 마녀의 섬 — 부하들을 돼지로 변신시킨 마녀와 대면합니다. 여기서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등장합니다. "승리 후 너희가 저지른 학살과 약탈, 강간 — 그 본모습이 돼지 아니냐"는 마녀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합니다.
- 망자의 땅(하데스) — 죽은 전우들이 예언합니다. "고향에는 너 혼자만 갈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운명이라면 내가 바꾸겠다"고 외치지만, 예언은 하나씩 들어맞습니다.
- 스퀼라(Scylla) 절벽의 괴물 — 부하 여섯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 태양신 소 떼의 섬 — 굶주린 부하들이 금지된 소를 먹고 전멸합니다.
- 칼립소의 섬 — 홀로 남은 오디세우스는 기억을 지우는 꽃을 먹이는 칼립소에게 7년을 붙잡혀 삽니다.
제 경험상 이 여정을 머릿속에 그려두고 들어가면 영화가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같은 장면인데 "아, 지금 여기구나"가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변장하고 귀환한 오디세우스가 왕궁에 들어섰을 때, 20년을 기다려 죽어가던 늙은 개가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내도, 아들도, 신하도 못 알아보는데 개 한 마리만이 알아봤다는 것 — 제가 직접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예상치 못하게 울컥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원전에서도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입니다(출처: Britannica).
핵심 메시지 — 독이 든 성배와 속죄의 힘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저는 꽤 오래 자리를 못 떴습니다. 놀란 감독이 이 신화를 골라 지금 시대에 영화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해 왕비를 만나 고백합니다. "우리는 트로이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밤, 우리는 학살과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신의 동상마저 모독했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청춘과 부하 모두를 잃었습니다." 승리(勝利)라는 성배(聖杯)에 독이 담겨 있었다는 것 — 이 고백 장면이 제 생각엔 영화 전체의 심장입니다. 여기서 속죄(贖罪)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하고 그 대가를 치르려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오디세우스가 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트로이 목마를 설계한 장본인이고, 전쟁의 모든 죄에 연루돼 있는데도 살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속죄와 참회가 용서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마지막에 왕권을 아들에게 모두 넘기고, 아내와 단둘이 해가 지는 서쪽 땅으로 떠나는 결말 — 그 서쪽은 그리스 신화에서 망자들의 땅이 있는 방향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들과, 자신을 위해 죽은 이들을 남은 생 동안 추모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해석이 제게는 가장 잘 맞았습니다.
쿠키 장면에 등장하는 아가멤논(Agamemnon)의 이야기도 이 맥락에서 읽혀야 합니다. 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출전 전에 역풍을 잠재우기 위해 딸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내에게는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겠다'고 속여 데려갔습니다. 승전해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암살당합니다. 속죄는커녕 거짓으로 묻어버렸고, 그 대가가 죽음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와 아가멤논 — 두 사람의 결말 차이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오디세이 영화는 신화인가요, 역사인가요?
A. 신화에 가깝지만 완전히 허구라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19세기 고고학 발굴을 통해 튀르키예 지역에서 트로이 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층이 실제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건이 신화적 서사로 포장돼 전해진 형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Q. 영화 속에서 젠데이야가 계속 환영으로 나오는데 누구인가요?
A. 전쟁의 여신 아테나(Athena)의 환영입니다. 트로이 전쟁 이후 그리스 병사들이 아테나 여신상의 목을 잘라 신을 모독했고, 젠데이야의 얼굴이 그 동상 얼굴과 교차 편집되며 신을 모독하는 장면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알고 보면 환영이 왜 계속 오디세우스를 따라다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Q. 아가멤논의 부인이 헬레네와 똑같이 생긴 이유가 뭔가요?
A. 영화의 설정상 헬레네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고, 그 언니가 아가멤논의 아내입니다. 즉, 형과 동생이 각각 언니와 여동생과 결혼한 구조입니다. 한 배우가 두 역할을 1인 2역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외모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관계를 모르면 헷갈리는 게 당연합니다.
Q. 제우스의 법이 영화에서 왜 중요한가요?
A. 영화 속에서 '제우스의 법(Xenia)'이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제니아란 나그네나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환대 문화로, 신이 인간으로 변장해 나타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습니다.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가 왕궁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이 법 덕분입니다. 이 개념을 모르면 몇몇 장면의 맥락이 빠져 이해가 어렵습니다.
Q. 영화 보기 전에 뭘 공부하고 가면 좋을까요?
A. 최소한 세 가지만 알고 가시면 충분합니다. 첫째는 트로이 전쟁의 발단(파리스의 심판과 헬레네), 둘째는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 흐름, 셋째는 제우스의 법(환대 문화)입니다. 이 세 가지만 머릿속에 넣고 들어가도 영화가 완전히 다르게 읽힙니다.
결론
제가 직접 봐서 느낀 건, 이 영화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입니다. 폴리스 중심의 그리스 사회 구조, 트로이 전쟁의 발단,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 그리고 속죄라는 주제까지 — 조각 하나하나가 제자리에 맞춰지는 순간 영화가 완전히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의 탐욕, 오만, 사랑, 속죄라는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이 이야기가 다시 스크린에 올라온 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관람 전이라면 이 글에서 정리한 배경 지식을 가볍게 읽고 극장에 가시길 권합니다. 이미 보셨다면, 마녀의 대사와 오디세우스의 고백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시면 영화가 한 층 더 깊게 읽힐 것입니다.